지난 평창올림픽에서 남북 단일팀으로 큰 화제를 모았던 ‘아이스하키’. 아이스하키처럼 하얀 빙판 위는 아니지만, 푸른 잔디 위에서 이와 비슷한 경기를 펼치는 종목이 ‘필드하키’다. 교원더오름의 박용숙 회원은 바로 이 필드하키의 국가대표 선수로 2회 연속 올림픽에 참가했다. 누구나 될 수 없는 ‘국가대표’, 특별한 경험을 갖고 있는 그와 이야기 나눠봤다.

글 _ 장홍석 / 사진 _ 김흥규


 

반갑습니다.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저는 지난해 8월에 교원 가족이 되었어요. 교원더오름이 9월에 정식으로 론칭했으니, 교원더오름 사업의 준비단계부터 함께해온 거죠. 알아보니까 제가 사보에 등장하는 첫 번째 교원더오름 회원이더라고요. 오늘 인터뷰하러 오는데, 많은 동료들이 얘기 잘 하라고 연락 왔어요.(웃음) 저를 시작으로 교원더오름 식구들이 교원 가족들과 좀 더 가까워졌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은 독특한 이력을 갖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저는 필드하키 국가대표 선수였어요. 중학교 때부터 시작해서, 2004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죠.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도 출전했어요.

 

어떻게 필드하키 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초등학교 때는 핸드볼 선수였어요. 6학년 때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의 핸드볼부가 해체되고, 부모님이 운동하는 것을 반대하셔서 그만두게 됐죠. 그런데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여자 필드하키가 은메달을 획득하면서, 국가적으로 메달종목을 육성하기 시작했어요. 제가 진학했던 중학교에도 하키부가 생겼죠. 그때는 중학교도 등록금을 냈었는데요. 하키부에 들어가면 등록금이 면제되고, 조금만 잘하면 좋은 대학교에도 진학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필드하키를 시작하게 됐죠. 제가 운동신경이 좋아서, 하키 선수로도 꽤 좋은 성적을 올렸어요.(웃음) 고등학교 때는 주장을 맡았었는데요. 저희 팀이 전국대회를 휩쓸었죠. 그리고 대학교 진학을 앞뒀을 때, 국가대표로 선발됐어요.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순간이 기억나시나요?
그럼요. 잊을 수 없죠. 사실 필드하키 선수들은 대학교에 진학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때 당시 전국에서 네 개의 대학교만이 여자 필드하키 선수들을 선발하고 있었거든요. 수많은 고등학생 선수들이 몰리니 경쟁이 치열했죠. 저도 대학입시에 문제가 생겨서 조금 방황하고 있었어요. 그때는 부모님 속을 많이 썩였죠.(웃음) 그러던 중에 갑자기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멍했던 것 같아요. 당시에 학교로 선발공지가 됐었는데요. 듣자마자 부모님께 연락했던 기억이 나네요. 저보다도 부모님께서 정말 기뻐하셨어요.

 


 

‘국가대표’는 모든 운동선수들의 꿈이잖아요. 꿈을 이룬 기분이 어땠을지 궁금해요.
저 또한 운동을 시작한 뒤, 반드시 국가대표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살았어요. 그 꿈을 이뤘기 때문에 누구보다 기뻤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조금만 늦게 국가대표가 되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들어요. 남들보다 빨리 꿈을 이루다 보니, 제 실력에 안주했던 측면도 있었던 것 같아요. 만약 그때 국가대표가 되지 않았더라면, 꿈을 이루기 위해 더욱 실력을 키웠지 않았을까요? 그러면 지금보다도 더 훌륭한 선수로 남았을 것 같아요. 욕심일지 모르겠지만, 아쉬움이 남죠.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저는 올림픽 · 아시안게임 · 필드하키 올림픽에 각각 2회씩 참가했어요. 국가대표로 공식 A매치 경기만 200 경기 이상을 뛰었죠. 아마 여자 필드하키 선수 중에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많이 뛰었을 거예요. 수많은 경기 중에서도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제가 첫 경기에서 부상을 입었거든요. 어깨 인대와 신경이 끊어지는 큰 부상이었죠. 올림픽 기간 중이라 한국에 돌아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어서, 간단한 응급조치만 하고 있었는데요. 제가 빠진 이후로 우리나라가 연패했어요. 감독님께서 가능하다면 마지막 경기만이라도 뛰어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하셨죠. 온몸에 테이핑을 하고 경기장에 들어서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사실, 워낙 큰 부상이라 의사 선생님께서 더 이상 선수 생활하는 것은 무리라고 하셨거든요. 물론 수술을 하고 계속해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지만, 그때는 마지막 경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던 것 같아요. 경기 중에도 계속 팔이 빠졌어요. 한 네다섯 번은 팔을 끼워가면서 뛰었던 것 같아요.(웃음)

 

국제대회에 나가면 세계 각국의 선수들이 모이다 보니, 재미있는 일도 많을 것 같아요.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때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어요. 그때만 해도 국제대회에 나갈 때, ‘보안대’ 소속의 분들이 동행해서 국가보안법을 위반하는지 감시했거든요. 국제대회에는 북한도 참가하다 보니,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서 따라오셨던 거죠. 그런데? 제가 친분이 있던 북한 선수가 있었어요. 국제대회 때마다 자주 마주치다 보니, 가까워지게 된 거죠. 아시안게임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려는데, 그 선수가 저한테 오더라고요. 선물이 있다면서 제 손에 무엇인가를 꼭 쥐여줬어요.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 잘 살라고 서로 인사한 뒤에 손을 폈는데요. 북한 배지가 있더라고요. 깜짝 놀랐죠. 혹시 보안대분들이 볼까 봐 얼른 쓰레기통에 버렸어요.(웃음) 그 친구는 보안대가 있는지 모르고, 순수한 마음에 기념이 될만한 선물을 준거죠. 잘살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은퇴 이후에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마치고 은퇴한 뒤, 대학교에서 코치 생활을 했어요. 하루는 운동장에 서서 선수들을 바라보는데, ‘언제까지 이 생활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치열한 경쟁에 지쳐, 운동과 관련된 일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고요. 결국 관두고 머릿속을 정리할 겸 6개월간 전국 일주를 떠났어요. 여행 중에 전라도 쪽에서 한 수학 강사님을 만났는데요. ‘이거다!’ 싶더라고요. 수학 강사는 나이를 먹어도 계속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전국 일주를 마치고 곧장 수학 공부를 시작했죠. 그런데 저는 워낙 어렸을 때부터 운동만 했다 보니, 정말 어렵더라고요.(웃음) 독한 마음을 먹고 초등학교 수학부터 다시 공부했죠. 꼭 하고 싶었고, 해내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차근차근 공부하니까 결국 되더라고요. 교원 가족이 되기 전까지 화성시 일대에서 알아주는 수학 강사로 10년간 활동했어요.

  

“일을 하다 보면,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야 하기도 해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제가
살아있음을 느껴요. 새롭게 도전한 이 일이 저에게 딱 맞는 일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교원더오름과는 어떻게 함께하게 되셨나요?
처음에는 지인을 통해, 교원그룹이 네트워크 사업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어요. 네트워크 상품들이 워낙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사업을 하는 것엔 관심이 없었어요. 새로 무엇인가를 시작하기엔 나이도 있고 체력적으로도 힘들어서 안하려고 했죠.(웃음) 그런데 문득 ‘교원그룹이니까 한 번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교원그룹이라면 뭔가 다를 거라는 확신이 있었거든요. 또, 제가 워낙 사람을 좋아하니까 더 늦기 전에 도전해보고 싶었죠.) 
 

치열한 경쟁에 지쳐 운동을 관뒀는데, 어떻게 보면 더욱 치열한 경쟁 속으로 들어오셨네요?
맞아요.(웃음) 그런데, 운동할 때 느꼈던 경쟁과는 달라요. 지금은 일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제가 살아있음을 느껴요. 저에게 딱 맞는 일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수학강사로 성공했던 이유 중 하나가 아이들이 왜 모르는지를 이해해줬기 때문이에요. 이 학생이 왜 모르는지 분석하고 그에 맞는 해답을 찾아줬던 거죠. 네트워크 사업도 비슷한 것 같아요. 함께 일하는 파트너들이 어려움을 겪을 땐, 왜 어려움을 겪는지 그 근본을 찾아 함께 고민하고 해답을 찾아주죠. 아이들이 점점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나가듯, 파트너들과 함께 어려움을 헤쳐나가다 보니 지금의 에메랄드 등급까지 올라올수 있었어요.
 

으로의 계획 혹은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으신가요?
요즘에는 초등학교에서도 네트워크 마케팅에 대해 가르친다고 해요. 언젠가는 네트워크 마케팅의 대표적인 브랜드와 인물로 교원더오름, 그리고 제가 교과서에 소개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웃음) 그 꿈을 위해 하루빨리 로열크라운 등급에 오를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한 가지 더 목표가 있다면, 제 파트너들 모두가 고소득을 올리는 거예요. 그때까지 절대 쉬지 않을 겁니다. 가족들에게도 미리 말해놨어요.(웃음) 모두가 함께 일하고 싶어하는 ‘최고의 네트워커 박용숙’이 되고 싶습니다.

 

 

 

 

 

<교원가족 2018.3호>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Posted by 교원소통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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